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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신응수 대목장을 환영하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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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신응수 대목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학창시절 조선시대 왕조 계보를 이렇게 외웠었는데, 지금에 와서도 이런 암기는 입에서 솔솔 나온다.
그랬다, 그때는 막 외웠다. 앞뒤 재지도 않고 시험에 나온다고 하니까 날마다 입에 올려 마구 외웠던 기억이 새롭다. 하물며 고려시대 왕조 계보도 외웠건만 왜 이렇게 조선시대 왕조만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인가!
바로 그렇게 정신없이 외웠던 조선시대의 심장부를 찾았다. 어떤 이는 그랬다. 세계 어느 왕조를 보더라고 한 왕조가 6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한 나라는 조선시대 뿐이라고 말이다.

이 조선왕조 6백년 경복궁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신응수 대목장이 Hope Makers' Club(이하 HMC) 2월 행사를 같이 했다.
“1991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에 총 사업비 1789억원이 투입됐습니다. 1995년 강녕전과 교태전이, 1999년 자선당이,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이 복원되었습니다. 정전인 근정전은 2001년 1월부터 2003년 11월까지 3년 10개월 동안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복원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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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근정전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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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대례나 사신을 맞이한 곳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우리나라 궁궐의 복원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으뜸 대목수인 도편수다. 흥례문과 광화문 등 경복궁 복원사업은 물론 불국사, 안압지, 수원화성 등 전국의 중요 문화재,사찰, 한옥은 물론이요, 최근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까지 그의 명성과 흔적은 곳곳에 묻어 있다.

“경복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먼저 주요 건물의 위치를 머리 속에 담고 상상을 하면서 역사 속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궁 앞면엔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 건춘, 영추문 북쪽엔 신무문이 있습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그 안에 근정문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보입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 쪽에 만춘전, 천추전이 놓여 있습니다. 사정전 뒤 향오문을 들어서면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 경성전이 있습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습니다. 경복궁 주축선 북쪽으로 후원 영역인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의 현장입니다”

역시 우리 선조들은 하나하나 문을 통해 한 장소에 들어가는 궁궐 형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문(사정전)→향오문(강녕전)→양의문(교태전)→향원정(건청궁)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나니 벌써 경복궁을 모두 둘러본 듯 환해진다.


경복궁(景福宮)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이 경복궁(景福宮)이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창건하여 이듬 해에 완성하였다. ‘경복’이란 임금의 은덕과 어진 정치로 모든 백성들이 아무런 걱정없이 잘 살아간다는 뜻이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개성으로 도읍을 옮겨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태종 때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했다. 태종은 경회루를 짓고,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했고,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됐다.
1895년 궁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1986년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 안에 있는 4,000여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경성전, 연생전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을 지었다. 또한 정문인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고 근정전의 정면 앞에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총독부청사를 지었다. 1945년 광복 후 총독부청사는 정부청사로 이용되고,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 총독부청사 건물로 이전되었으나 1995년에 완전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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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았을까? 진진하게 경청하는 회원들

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자리를 잡고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이 마당에서는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耆老宴) 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
정말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이곳에서 정 몇 품, 종 몇 품의 신하들이 한 줄로 쭉 서서 대례를 했을까? 그들의 모습과 숨결은 느낄 수 없지만 여기에서 군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던 그들의 환영들이 보인다. 오죽하면 대역죄를 지고 귀향을 가서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문안인사를 올린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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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의 앞마당에서 훌륭한 인재들의 과거시험이 치뤄졌다니 실로 놀랍다

강녕전과 교태전

왕과 왕비의 침전 부분은 두개로 나눠진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룰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특히 이곳은  치욕스런 순간도 겪어야 했다. 경복궁 중건 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고,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된 것이다.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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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과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즉 왕이 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처음 경복궁 복원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큰 국가적인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제 손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하나하나씩 새롭게 태어나고 후손들이 그 문화재를 보면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터 오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20년동안 이 사업이 계속 되면서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이 함께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긴 세월을 함께 하지 못했을 겁니다.”
신응수 대목장에게는 고집 센 장인정신이 배어나온다. 그 고집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수장만이 가지는 자부심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소리 높여 설명한다. 자신의 혼이 담긴 역사의 기록물들을 보면서 그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다. 궁궐 건축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좋은 재질의 나무를 구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소나무가 가장 우수 하단다. 하지만 그 공사 중에도 수입 목재들이 버젓이 눈에 띄는 현장을 볼 때마다 죄인이 된 느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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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생활, 휴식공간으로써의 의미가 크다


건청궁

건청궁은 여느 궁궐이 아니다. 궁궐 건축이 갖는 격식과 법도보다는 생활의 편리함에 중점을 두어 양반집 같은 모습이다. 특히  2007년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가 21세기 들어 가장 잘 지은 한옥으로 꼽힐 만큼 정성을 다하고 단청도 색깔을 입히지 않도록 해서 소나무 고유의 무늬를 그대로 살린 백골집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펴고자 했던 장소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불을 밝힌 기념비적인 장소다. 여기에 건청궁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녹산에서 불태워진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최근 명성황후에 대한 드라마나 뮤지컬,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황후가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왕비가 죽은 것이 아닌, 약소국이 강대국에 의해 어떻게 무참히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묻혀버린 패자의 이야기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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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은 아픈 역사의 장소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곳이다


GNL 김성희 회장은 “매번 경복궁 앞을 지나거나 흥례문 앞만 보고 경복궁을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속속들이 조선시대 궁궐에 담긴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어느새 조선시대 어느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와 있는 느낌이다” 면서 “근정전 앞에 서니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때는 어디에 있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되는 소중한 인문학으로의 여행이었다”고 소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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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이 왜 생뚱맞게 경복궁내에 버티고 서 있는가?


건청궁에서 보니 국립민속박물관과 청와대의 푸른 기와 지붕이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왜 이 정궁 안에 턱 버티고 서 있는 것인지? 자신이 주인인양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경복’이란 임금의 은덕과 어진 정치로 모든 백성들이 아무런 걱정없이 잘 살아간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경복의 기운이 청와대에도 불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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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앞에서 회원들은 조선왕조 6백년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창덕궁(昌德宮)

1405년(태종 5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권하기 까지 정궁역할을 했다.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순조 당시 300동에 이르던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어 총 79동의 건물만 남았었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동안 53동의 건물을 복원하고 대소전각들을 중수하여 현재 건물 수는 총 137동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경궁(昌慶宮)

1483년(성동 14)에 세 분의 oeql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지은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국의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인해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 남은 명성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성전은 조선 왕중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훼손된 것을 1984년 중건을 시작하여 문정전 및 정전회랑, 빈양문 등을 중건하였다.

덕수궁(德壽宮)

임진왜란때 선조가 임시 거처로 이용한 후 별궁으로 270여년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서 환궁하여 이곳에서 지내면서 경운궁이라 부르고 규모도 확장했다. 고종 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한 후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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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문성

2010/03/08 09:59 2010/03/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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